
2026년 4월, 계량서지학 분야의 석학 로크만 메호 베이루트 아메리칸대 교수가 한 인터뷰에서 던진 질문 하나가 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만약 대학 순위와 지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관행이 나타났을까?” 이 물음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오늘날 대학들이 글로벌 랭킹을 올리기 위해 외부 연구자를 이름만 빌려 쓰는 이른바 ‘학술 용병‘ 관행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메호 교수는 이를 명백한 조작은 아니지만 학계의 신뢰를 잠식하는 ‘의심스러운 연구 관행(QRP, Questionable Research Practice)’으로 규정했다. 표절이 도핑이라면 학술 용병은 심판 몰래 규칙을 우회하는 반칙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칼럼은 그 반칙이 어디서 비롯됐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지를 들여다본다.
출처 : “표절이 도핑이면 ‘학술 용병‘은 반칙” 연구윤리 석학의 일침
학술 용병이란?

‘학술 용병‘이란 대학이 자체적인 연구 역량을 키우는 대신, 논문 인용 수가 많은 외부 연구자를 영입해 그들의 소속에 자교 이름을 올리는 방식으로 순위를 끌어올리는 관행이다. 연구자는 여러 대학에 이름을 동시에 등록하고, 논문 한 편으로 복수의 기관에 실적을 배분한다. 학술 데이터베이스는 논문에 기재된 소속 기관 모두를 해당 논문의 성과로 집계하기 때문에, 이 방식은 시스템의 허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일부 대학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고인용 연구자들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소속을 변경하게 해 단기간에 세계 순위를 대폭 끌어올린 전력이 있다. 이런 관행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QS·THE 등 글로벌 랭킹 지표에 민감한 대학이라면 어디든 나타날 수 있는 구조적 현상이다. ‘문어발 소속’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대학과 연구자 모두에게 단기적 이익을 주지만, 학문 공동체 전체가 쌓아온 신뢰의 기반을 서서히 허문다.
‘학술 용병’은 왜 등장했을까

대학간 서열
대학의 순위는 이제 학문적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 정치적 아젠다와 직결된다. 각국 정부는 자국 대학의 세계 순위를 국가 경쟁력의 지표로 삼고, 상위권 대학에 더 많은 예산과 권한을 몰아주는 정책을 설계해왔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학 구조조정과 재정 지원 사업이 사실상 순위 및 평가 성과와 연동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정당화될수록 대학들은 생존을 위해 단기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다. 순위를 올리는 것이 곧 재정 확보이고, 재정 확보가 곧 생존이 되는 구조에서 윤리적 고민은 뒷순위로 밀리기 쉽다.
사회 구조적 원인
고등교육이 보편화되면서 대학은 더 이상 소수를 위한 엘리트 기관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대학 간 서열화는 더욱 강화됐다. 학벌과 기관 브랜드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학의 ‘이름값’은 취업·연구비·국제 협력 등 모든 영역에서 실질적인 자본으로 작동한다. 이 구조 안에서 대학 행정가들은 연구의 질을 높이는 10년짜리 투자보다 순위표에 즉각 반영되는 숫자 개선을 선호하게 된다. 대학 평가 문화가 ‘실질’보다 ‘가시성’을 보상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이상, 용병 영입은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개별 대학의 탐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인센티브 구조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제도·경제적 요인
QS, THE 같은 민간 평가 기관이 ‘국제 협력 비율’과 ‘논문 인용 수’를 핵심 지표로 삼으면서 대학들에게 구체적인 ‘공략 목표‘를 제시한 셈이 됐다. 논문에 복수 소속을 기재하면 각 기관 모두의 실적으로 집계되는 학술 데이터베이스의 방식은, 제도 설계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허점을 만들어냈다. 대학 입장에서는 수백억 원을 들여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보다, 고인용 연구자 한 명을 자문 형태로 연결하는 것이 훨씬 비용 대비 효과가 높다. 이 경제적 유인이 강력한 한, 제도적 보완 없이 관행을 막기는 어렵다. 결국 이 문제는 개인의 윤리 문제이기 이전에 잘못 설계된 평가 시스템이 만들어낸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다.
학술용병의 이익과 손해

이 구조에서 이익을 보는 주체는 크게 세 축으로 나뉜다. 첫째는 순위를 끌어올려 정부 지원금과 우수 학생을 유치하려는 대학 행정부다. 둘째는 소속 병기 대가로 금전적 보상과 추가적인 명망을 얻는 고인용 연구자들이다. 셋째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대학이 상위권 랭킹에 진입할수록 평가 자체의 권위와 영향력이 커지는 민간 평가 기관들이다. 반면 손해를 보는 쪽은 훨씬 광범위하다. 지표 경쟁에서 밀려나는 신진 연구자들, 실질적인 지도 없이 이름만 걸린 교수 밑에 배치된 대학원생들, 그리고 대학 순위를 신뢰의 근거로 삼아 진학이나 협력을 결정하는 일반 시민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다. 이 구조는 이익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비용은 사회 전체에 분산되는 전형적인 비대칭 게임의 형태를 띤다.
한국 대학의 신뢰

‘학술 용병’ 논란은 단순히 대학 평가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신뢰’를 어디에 위탁하는지에 대한 더 큰 질문을 던진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가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직접 판단 대신 순위, 인증, 지표라는 외부의 기준에 기대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대학 순위도 그런 ‘대리 신뢰‘의 한 형태였는데, 그 수치 자체가 조작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면 신뢰의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동시에 연구 윤리에 대한 국제적 감시망은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메호 교수 같은 계량서지학자들이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상 소속 패턴을 포착하고 공론화하는 흐름은, 학계 내부의 자정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도 읽을 수 있다. 앞으로는 순위의 ‘숫자’보다 그 숫자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투명성 요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대학 서열에 유독 민감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글로벌 랭킹은 그 서열을 국제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해왔다. 학술 용병 관행이 확산될수록, 수치로 포장된 한국 대학의 국제 경쟁력은 실제보다 부풀려진 ‘거품 순위’일 수 있다는 의심이 커진다. 이는 대학 교육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고, 학위와 연구 성과의 실질적 가치가 절하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산 측면에서도 문제는 심각하다. 대학들이 실질적인 연구 환경 개선이나 신진 학자 육성 대신 해외 유명 학자의 자문 계약에 재원을 투입한다면, 그 비용은 결국 등록금이나 공공 재정으로 충당된다. 고등교육에 투입되는 사회적 자원이 내실이 아닌 ‘외양 꾸미기’에 소비된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교육 정의의 차원에서도 짚어야 할 사안이다.
피해는 묵묵한 연구원들이

이 관행의 가장 조용한 피해자는 묵묵히 연구실을 지키는 연구자들과 그들에게서 배우길 기대했던 학생들이다. 진정성 있게 한 분야를 파고드는 연구자는 인용 수나 소속 기관 브랜드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굳어지면, 학문의 다양성 자체가 위협받는다. 대학원생들의 경우 자신의 지도 교수가 실질적인 지도 역량 없이 이름만 걸어둔 인물이라면, 그것은 학습권과 연구권의 침해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세금으로 지원한 대학이 순위 관리에 급급해 진짜 역할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공적 자원의 낭비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대학의 순위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뒤에 어떤 구조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태도를 갖추는 일이다. 소비자로서, 납세자로서, 지식의 수요자로서 우리는 ‘숫자의 의미’를 물을 권리가 있다.
내가 보는 핵심 포인트
결국 이번 논란이 드러내는 것은 ‘측정이 목적을 집어삼키는’ 현상이다. 대학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탐구하고 인재를 기르는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순위 지표가 그 목적보다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평가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순간, 시스템은 반드시 왜곡을 낳는다. 이는 대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의료 현장의 환자 수 채우기, 학교 교육의 수능 점수 최적화, 언론의 클릭 수 경쟁 모두 같은 구조적 병리를 공유한다. 학술 용병 문제는 그 병리가 ‘지식의 전당’에서 발현된 사례로, 우리 사회가 무엇을 보상하고 무엇을 보상하지 않는지를 정직하게 반영한다. 이 구조를 바꾸려면 개인의 윤리 강조를 넘어, 잘못된 인센티브를 설계한 평가 체계 자체를 손봐야 한다.
- 지식 탐구보다 순위가 우선된 대학의 ‘목적 전도’ 현상
- 실적 수치에만 보상하는 잘못된 인센티브가 낳은 왜곡
- 개인의 윤리보다 평가 시스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할 때
순위를 올리기 위해 연구를 포기한 대학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잃은 것이다.